강해설교는 복음을 알기 어렵다고?
어느 성도님께서 나에게 ‘뒷목 잡을' 영상을 공유해주셨다.
어느 잘생긴 목사님께서 ‘복음을 알기 어려운 설교'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10분 남짓의 짧은 영상이었다. 아.. 이 목사님. 잘생기셨다. 말씀도 잘하신다. 그런데, 하시는 이야기는 필자가 듣고 있기 ‘많이' 불편하다.

요지는 ‘강해 설교'는 1. 좁은 본문을 자세히 파헤치고, 2. 성경에 대한 편협하고 불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은 ‘강해 설교’를 들으면 ‘복음을 알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신다. 아울러, 성도들에게 성경을 전하려면 성경을 간단히 ‘요약'해 주시면서 성경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신다.
하….
뭐, 일단 ‘성경을 간단히 전하는 것'은 필요하다 치자. 그런데, ‘강해설교'가 ‘복음'을 알기 어려운 설교라…
칼빈, 로이드 존스, 존 맥아더, 존 파이퍼, 이동원, 옥한흠, 이찬수 목사님등 설교로 ‘유명한' 목사님들 중 많은 분들이 강해 설교가들 이시다. 만약 저 목사님의 ‘논리'라면, 이 분들은 ‘성경에 대해 편협하고 불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분들이 되어야 한다.
결국 저 설교 영상에 대한 이야기가 이슈 된 ‘오픈 카톡'을 찾아가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알던 곳이지만, 한동안 필자가 떠나있었던 ‘오픈카톡'이다. 필자는 이 곳에서 오랜 시간 ‘다섯째날창조된닭'이란 닉네임으로 활동해 왔다.
아니나 다를까, 방은 해당 주제로 시끌하다. 그렇게 방에 쳐들어(?) 가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중간에 ‘당사자 목사님'도 찾아 오셨다. 당사자 목사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어 칭찬도 많이 해드리고 했는데…. 결국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방을 떠나셨다. 아쉽다. 이야기를 나눴으면 많은 부분을 알고 배우고 가셨을텐데…
강해 설교란 무엇일까?
강해 설교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저 목사님'이 생각하는 그런 ‘정의'를 가지고 강해 설교에 대해 가르치는 ‘설교 선생'은 없다. 강해 설교는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어 회중들에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 특히나 요즘에는 강해 설교에서 그 의미가 성도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까지도 설명하는 것을 ‘설교의 정의'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여러 설교 선생들이 각각 ‘강해 설교'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아래의 블로그를 참고해보자.
https://blog.naver.com/pureshower/222734424175blog.naver.com혹, 위의 블로그를 들어가 봤다면... 맞다. 당시의 대화 내용이다.
나중에 당사자 분께서 찾아왔다. 결국 당사자 분이랑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아쉽다. 그런데 이 타이핑을 치게 된 것은, 그 앞전에 나눈 해석의 ‘미시-거시' 관련 대화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강해 설교'에 대한 ‘용감한 비판(?)’을 가하신 ‘목사님'의 입장에 대해 좀 생각해보자.
사실, ‘강해 설교'는 어렵다. 강해 설교는 ‘성경 본문의 의미'와 ‘요지'를 설교자가 ‘명확하게’ 파악하고 ‘읽어내지' 못하면, 설교의 ‘방향'을 상실하기 쉽거나 혹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될 수 있다. 성경 본문의 ‘요지'를 파악하고 본문의 의도를 ‘읽어내는' 과정을 흔히 ‘주해' 또는 ‘석의'라고 한다. 이 주해의 과정, 또는 석의의 과정에서는 본문을 ‘철저히' 관찰하며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 그 본문의 ‘의도’를 찾게 된다. 설교자는 ‘본문의 의도'를 명확히 ‘읽어내기' 위해 번역 성경이 아닌 히브리어, 헬라어로 된 ‘원어 성경'을 관찰한다. 또 이 본문이 왜 쓰여젔고,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본문이 쓰여진 ‘시대적 상황'을 살핀다.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을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는 ‘전문적인 지식'도 포함이 된다. 이러한 과정들은 모두 ‘해당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듣고자 하는데 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설교자가 찾지 못하면, 위의 ‘정보'들은 본문의 ‘의도'와는 상관 없는 ‘주변 요소’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의도와는 상관 없이 ‘주변 요소'들만 모아 놓고 ‘전하게' 되면, 위의 목사님이 언급한 것과 같은 ‘상황'이 되기 쉽다 그래서, ‘강해 설교'는 쉽지 않다.
하지만, 강해 설교 가운데서 ‘본문의 의미'가 회중들 가운데 ‘드러나게' 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성경 말씀이 회중들을 ‘주도'하고, 성경이 회중들을 ‘압도' 한다. 설교 가운데서 ‘말씀의 권위'가 드러난다. 본문의 참 의미를 회중들이 깨닫고 이를 자신의 ‘심령'에 비추어 자기 자신 속에서 ‘죄'가 드러날 때, 회중들은 본문에 엎드려 눈물로 회개할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오늘날의 많은 ‘신학교'들은 학생들에게 ‘강해 설교'를 가르치려고 한다. 강해 설교는 하기 어려운데도 굳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성경 신학의 발전'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전에 신학교에서는 ‘성경'은 가르치지 않고 ‘신학'만 가르친다는 오명이 있었다. 하지만 1970~80년 이후로부터 성경신학은 빠르게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많은 신학교들은 잘 다듬어진 ‘성경신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성경 자체'를 가르치는데 관심이 많다. 그런데 이런 ‘성경 신학'이 ‘실천 신학'과 만나는 접점이 바로 ‘설교'다. 신학교가 가르치는 ‘성경신학'과 ‘성경'은 ‘강해 설교'라는 ‘실천 신학'을 통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많은 신학교는 성경 자체를 설교하는 ‘강해 설교'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려 한다. 그만큼 오늘날 ‘설교’를 이야기 하고 또 가르치는데 있어 ‘강해 설교'는 상당히 중요하고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성경 각 권이 가지고 있는 큰그림
만약 설교가가 회중들에게 성경 각 권에 대해 요약된 내용을 알려주어, 회중들이 직접 성경 내용을 알고 또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돕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설교가 또는 목회자가 ‘회중'과 ‘성도'들로부터 오는 ‘필요'에 따른 선택이다. 각 권의 내용을 ‘강해'로 자세히 설명하든, 각 권의 ‘전체 그림'을 성도들에게 보여주어 성도들이 성경의 내용을 스스로 ‘읽고' 알 수 있도록 하든, 그것은 목회자의 선택에 있다.
문제는 이 성경 각 권의 ‘전체 그림'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여주느냐에 있다. 회중들에게, 성도들에게 한 권의 ‘전체 그림'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목회자 스스로가 ‘한 권의 책'을 ‘하나의 주제'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하나의 주제에, 하나의 문장에 해당 권의 ‘모든 요소'와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것을 필자는 각 권의 ‘주제'라고 하겠다.
그럼 각 권의 ‘주제'는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이 역시 ‘주해'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결국 ‘주제'는 한 권이 담고 있는 ‘각각의 이야기(이하 ‘플롯’[plot])’ 또는 ‘각각의 문단’이 말하고자 하는 ‘소주제'의 집합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과 각 플롯과 문단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들이 명쾌하게 나와야 한다. 이 주제들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하나의 단어와 문장으로 ‘선명하게' 통합이 될 때 이것이 해당 권의 ‘주제'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권이 품고 있는 온전한 ‘주제'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제는 해당 권의 ‘각 문단'의 주제와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각 문단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주제'는 그 문단이 품고 있는 ‘문장'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각 문장의 ‘해석'은 해당 ‘단어'들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통합과 일치가 모두 온전히 이루어질 때 한 권의 주제가 명확하게 나온다.
‘명확한 주제'는 해당 권을 설명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회중들에게 ‘명확한 주제'를 전달 하고 이를 통해 해당 ‘권'을 읽힐 때 해당 권의 의미가 주제를 통해 생명을 얻고 살아난다. 요한복음에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 주제를 통해 요한복음 ‘전체'의 문단 배열이 살아나고, 문단이 품고 있는 ‘문장'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다. 반대로 이 주제가 ‘명쾌하지 못하면', 그 주제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문장'과 ‘문단'은 그 주제에 부합하는 ‘일부'이다. 요한복음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하나의 권이 ‘온전히’ 주해가 이루어지면, 설교가의 머리 속에서 해당 권의 내용과 흐름이 ‘고속도로' 처럼 명쾌하게 ‘뻥'하고 속시원하게 뚫린다. 이렇게 한번 한 권의 의미가 ‘뻥' 뚫리고 나면, 회중들에게 그 책의 ‘전체 그림'을 하나의 주제와 문장으로 명쾌하게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뻥 뚤린' 주제로 해당 책을 ‘설명'하게 될 때, 본문은 회중들 가운데서 ‘생명'을 얻고, 회중들이 그 본문을 ‘읽을 때 마다’ 그 의미가 살아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주어진다. 과연 설교가는 이 ‘큰 그림'을 어떻게 ‘찾느냐' 이다.
한 권의 큰그림을 위해, 다시 문장과 문장으로
많은 목사님들께서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의 의미를 안다고 생각을 하신다. 나도 그래왔다. 성경을 많이 읽어 그 내용에 ‘익숙한' 것 만으로도 의미를 찾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성경에는 ‘많이 읽는 것'만으로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단순히 내가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의미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스스로가 ‘요한복음'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본인이 알고 있는 ‘요한복음'에 대한 지식으로 요한복음 구절 ‘하나 하나'의 의미를 모두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스스로가 ‘요한복음’을 알고 있다 생각하면 안된다. 목회자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예전에 필자의 학생 중 하나가 늘 이 말을 하였다. 자신은 요한복음을 배워서 알고 있다며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어서 멀리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복음서다” 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래서 그 독수리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느냐?” 라고 물었다. 당연히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구절이 생기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번역상 표현이 어려운 단어 때문일 수도 있고, 번역을 하면서 원문이 사용하는 ‘언어적 장치'가 가려지는 경우도 있다. 더러는 문장 구조 자체가 한국어랑 달라서 구조가 바뀌며 생기는 문제도 있다. 이런 경우 ‘원 본문'이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알기 어려워진다. 흔하지는 않지만 번역이 잘못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떠한 구절은 본문이 쓰여진 ‘문화’와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선지서의 경우 많은 부분 이스라엘의 ‘몰락'과 관련된 구절들이다.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하였는지 그 타락의 모습을 알지 못하면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하시는지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해당 권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찾아 정리하면서 각 구절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설명하려는 책이 바로 ‘주석서'이다. 주석서를 쓰는 사람은 해당 ‘권'을 오랜 시간 관찰하고, 관련된 요소들을 연구해오신 분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주석서들이 같은 책과 같은 구절을 놓고 ‘같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해석을 할 때 각자가 중요시 여기는 우선순위가 다르다. 또는 관점이 다른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주석가들' 역시 본문을 들여다 볼 때 ‘선입견'에 대해 자유롭지가 못하다. 마태복음을 바라볼 때 ‘선교'라는 주제에 꽂힌 주석가는 마태복음 본문을 ‘선교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15장의 ‘칠병 이어’ 사건은 오병이어와 구분하려 한다. ‘바구니'란 단어와 ‘광주리'란 단어의 차이를 들며 칠병이어는 ‘이방인'을 위한 사건으로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단순히 ‘단어'의 차이만으로 15장 사건이 ‘이방인'에게 보인 사건이라 단정 짓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부분적 요소'만을 가지고 온전히 검토되지 않은 ‘전체 요소'에 끼워 맞추게 될 때, 해당 문단의 나머지 요소들과 특징들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것은 ‘제대로 된 큰그림'이 아니다. 이렇게 제시되는 큰그림은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 결국 ‘무너지고' 만다. 또는, ‘잘못된 큰그림'으로 인해 본문이 말하려 하는 의도를 ‘가리는’ 불쌍사를 초래한다.
결국 설교자는 주석가들이 제시하는 해당 권의 ‘주제'가 모든 ‘구절'에서 설명 가능한 것인지(또 그 설명이 합당한지)를 검토해야 한다. 스스로 한 구절 한 구절을 관찰하고, 살피며, 이것이 맞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혹은 한 구절 한 구절을 주해하면서 스스로 그 ‘주제'를 발견해 갈 수도 있다. 이것을 아시는 목사님들은 처음부터 주석가들의 말만 듣고 해당 권의 ‘큰그림'을 제시하려기 보다는, 해당 권의 본문을 ‘순차적'으로 설교하면서 설교하는 구절들을 순차적으로 검토해가려 하신다. 강해 설교가들이 책을 ‘순서대로' 설교하려는데는 이러한 이유도 있다.
이러한 과정은 무척이나 고되고 힘들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경우에도 금요 예배때 ‘로마서'를 설교하셨지만, 전체를 설교하는데 13년이 걸리셨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 ‘로마서의 복음'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는 그 어느 설교가 보다도 ‘강력하게' 전하셨다. 물론 ‘시간'에 대하여는 설교자와 목회자 ‘개인'에 따라 다르다. 누구는 한 권을 검토하며 설교하는데 6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잘 아는 책이라면, 또 얼마나 자세하게 검토하는지에 따라 2-3개월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순서대로' 한 권의 책 ‘전부'를 검토하는데 있다.
현재 대학촌 교회를 섬기고 있는 박형대 목사님의 경우, 해당 주간의 큐티 본문 중 하나로 설교를 하신다. 큐티는 보통 5-6년에 한번 꼴로 성경을 한 바퀴 돈다. 설교는 해당 주간의 큐티 본문 중 하나로 하시지만, 설교하시는 해당 책의 ‘큰그림'을 회중들에게 전부 보여주려 하신다. 그래서 목사님은 성도들보다 한달 앞서 큐티 묵상을 하신다. 스스로 본문을 연구하고, 읽고, 검토하는 시간을 가지시는 것이다. 본문이 가진 ‘큰 그림'을 성도들보다 먼저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성도들에게 ‘큰 그림'이 필요하든, 본문 본문을 ‘자세히'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든, 설교자는 해당 권을 온전히 읽고, 공부하고, 검토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스스로 본문을 순차적으로 읽고, 검토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확신할 수 있는 큰그림'을 발견할 때 까지 노력하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큰그림을 찾고 전달하려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선 안된다. 그것이 말씀을 맡은 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실패했다고 ‘주저'해서도 안된다. 제대로 된 방법으로 노력하다 보면 되게 되있다. 중요한 것은 인내와 노력이다.
올해 초부터 필자는 성도들과 함께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요한복음의 말씀을 전하였다. 큐티 본문에 따라 책을 순차적으로 살폈다. 책의 ‘전부'를 설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요한복음 전부'를 검토하려 하였고, 성도들에게 최종적으로는 요한복음의 ‘큰그림'을 보여주려 하였다. 큐티와 함께 성도님들과 매 주 요한복음 ‘본문'을 순차적으로 살피면서, ‘요한복음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장과 장의 주제가 계속 연결되고 연결되어, 최종적으로는 회중들 안에서 요한복음의 ‘큰그림'이 드러났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리 모두는 말씀 앞에 압도될 수 밖에 없었다. 설교자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펑펑 우는 참 회개의 눈물을 경험하였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참 회개'의 표증으로 설교자와 회중은 모두 ‘우리가 본문 앞에서 마주하는 요한복음의 의미가 옳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큰 그림'을 발견하는데 있어 도움을 주는 것은 바로 본문이 가진 ‘작은 요소들', 이른바 ‘미시적 요소'들이다. 각 단어 단어들, 각 요소 요소들. 필자는 이를 위해 한 단어 한 단어를 살핀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직접 번역해 보면서 그 의도와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미시적' 요소들이 모두 모이고, 이 ‘미시적 요소'가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통합이 되고, 하나의 주제를 드러낼 때 비로서 ‘해당 권의 주제'가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설명하려는 것이 바로 필자가 카톡에서 나눈 ‘미시-거시'의 대화이다. 다음번에는 필자가 카톡에서 나눈 대화를 짚어 보며, 대화 속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였는지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